[골프역사] 조지 데커 장군의 골프
[골프역사] 조지 데커 장군의 골프
  • 김혜경
  • 승인 2016.06.0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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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데커 장군의 골프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 큰 발자취

 

외국인으로서 초창기의 한국 골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꼽으라면 조지 데커 전 미8군사령관이 단연 으뜸이다. 데커 사령관은 재임 시절(1957~1959) 군자리 골프장 건설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고 서울CC의 단골손님으로 필드에서 당시의 군사 현안들을 다룰 정도로 대단한 골프광이었다. 한마디로 데커 장군은 세계적인 골프수준을 도입해 한국 골프의 눈을 뜨게 해준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인 조지 데커 사령관

 

조지 데커(George H․Decker) 장군의 골프 실력은 핸디캡 3정도. 1주일에 두 번 정도 빠짐없이 서울CC에서 골프를 즐겼다. 한국 측에서 그의 단골 파트너는 김정렬 당시 국방장관과 유재흥 합참의장이었다. 데커 장군이 미8군 가운데서 공을 잘 치는 골퍼를 데려올테니 한국 측에선 김 장관이나 유 의장이 교대로 로우핸디캐퍼 한명씩을 동반토록 제안해 골프에 푹 빠졌던 시기였다. 그 덕택에 한국의 신용남 씨 등 정‧재계 인사들이 골프 아니고서는 만날 수도 없었던 데커 장군과 여러 번 라운드를 함께 하는 기회를 가졌다.

데커 장군과 1주일에 한두 번 만나 서울CC에서 공을 치면서 군관계자들은 한미 군사적 현안문제를 충분히 상의했기 때문에 집무실에서 따로 만나지 않아도 사태의 해결이 척척 잘 돼 나갔을 정도였다고 당시 김정렬 장군은 말한 적이 있다.

데커 장군의 골프는 부임 1년만인 1958년 서울CC에서 열린 제5회 대통령배 한국아마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에서 내로라할 고수급들이 총 출동한 대회였다. 36홀 스크래치로 무어와 데커는 예선 1, 2위에 랭크한 고수들이었다. 허정구와 조건중 그리고 김건영을 매치플레이로 이긴 무어와 한 홍, 박기순, 신용남 유재흥 등이 출전한 대회에 매치플레이로 우열을 가리게 됐다. 데커 장군은 준결승에서 김정렬 장군을 이겼고 결승전에서는 무어(1958년 제1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 우승자)를 따돌려 5대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라운드에서는 오직 골프에만 몰두

 

코스를 함께 돌 때마다 조지 데커 장군은 언제나 교양 있고 세련된 미국 중년신사의 풍모를 물씬 풍겨 주었다. 라운드 중엔 말수가 적었고 룰이나 에티켓은 철저했다. 간혹 상대가 실수를 연발해 겸연쩍어 할 때면 농담 섞인 어조로 용기를 북돋워 주기도 했다.

그는 특히 18홀을 돌면서 먹고 마시는 일이 일체 없었고 티업순서를 기다리면서 간이 의자에 앉거나 그늘집에 들르는 일도 없었다. 오로지 골프를 통해 체력을 단련하며 기분전환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4성 장군이었지만 골프를 잘한다면 상사나 중사 계급을 막론하고 그의 세단에 스스럼없이 태우고 서울CC에 동행하곤 했다. 그의 이러한 성격 탓으로 미8군 소속의 일류 골퍼들이 많이 알려지게 됐고 그중에서도 오빌 무디가 유명했다.

데커 장군의 영향력으로 한국에 온 오빌 무디는 프로골퍼였다. 그는 당시 상사로 8군에 근무하면서 탁월한 골프실력으로 국내 저명인사들과 두루두루 교분을 가졌다. 훗날 미국으로 돌아간 무디는 US오픈에서 우승, 정상급 프로로 영예를 누렸다.

 

골프 통안 한미국방현안문제 해결

 

조지 데커 장군은 1950년대 후반기에 주한 미군 사령관을 지낸 장군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초창기의 정치나 군사적인 면에 여러 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데커 장군이 정확히 미8군 사령관에 부임한 것은 1957년 7월 1일, 1959년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해 귀국할 때까지 약 2년 동안 재직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데커 장군은 철두철미한 군인이었으며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특히 골프에서는 일류급 플레이어였다. 우리나라 초창기 골프에 많은 교훈을 남긴 셈이다. 한편 김정렬 씨가 국방장관으로 부임한 것은 데커 장군이 부임한 같은 해 7월 6일이었다. 따라서 데커 장군은 김정렬 씨와는 유대가 깊었다. 한미 현안문제를 딱딱한 사무실에서 해결한 게 아니라 탁 트인 서울CC에서 원활히 해결했으니 소위말해서 ‘국방필드(?)’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한마디로 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온후한 장군이었죠. 본인과 유재흥 합참의장, 데커 장군, 미8군 고급 장성, 이렇게 우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서울CC에서 공을 치곤 했습니다. 골프 덕을 많이 보았다고나 할까요? 나와 데커 장군 사이엔 공적인 면에서 어려운 점이 없었습니다.” 김정렬 국방장관이 말하는 데커 장군의 면모다.

데커 장군과 관련한 골프 에피소드 중에 한 가지 아리송한 것이 있다. 당시 미8군사령관이 한국에 새로 부임하게 되면 청와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는 것이 관례였다. 1957년 7월 데커 사령관은 부임하자마자 이 대통령을 예방하기에 앞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CC의 상공을 비행하며 코스를 먼저 살펴보아 당시 회원들에게 화제를 불러 모았다. 또 한 가지는 데커 장군이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이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찾은 곳이 서울컨트리클럽이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하겠으나, 그만큼 그의 골프사랑이 극진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나중에 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내한했을 때도 경무대에서 나오자마자 찾은 곳이 서울CC였다. 그날 플레이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울CC 골프대회 미8군 골프장을 만든 데커 장군

 

데커 장군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또 한 가지 있다.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개방된 미용산 기지 내 미8군 코스 조성이었다. 데커 장군은 한국부임 후 곧 미8군 영내에 골프장 신설을 착수했다. 1년 3개월 남짓 지난 1958년 10월 1일에 마침내 9홀 규모로 8군 코스가 오픈 했다.

서울CC, 부산CC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조성된 것이 미8군 골프장으로, 훗날 짧은 18홀로 확장됐다. 개장식에서 한국 최초로 연막탄을 사용해 인상적이었으며, 김정렬 국방부장관, 유재흥 합참의장. 데커 장군, 주한 미대사가 한 팀이 되어 첫 라운드를 했다. 당시 8군 골프장의 신설예정지의 일부가 우리 군용지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살고 있던 국유지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데커 장군은 김정렬 장군에게 이 땅의 사용을 부탁했다. 급기야 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됐고, 이 대통령은 대신 미군의 남산에 있는 8군 사격장과 교환하자고 제의해 결국 남산사격장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대신 미8군골프장의 부지가 확보된 것이다. 데커 장군은 한국 말고도 다른 나라의 부임지에도 골프장을 두 군데나 만든 주인공이다.

1958년 미8군 주둔지역에 우선 9홀 코스로 골프장이 생긴 뒤로 서울CC에서 선발된 아마골퍼들과 8군 소속 골퍼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친선 골프대회를 열어 한미관계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이 친선 대회는 18홀에 각 팀에서 2명씩 4명이 한조가 되어 일제히 티오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국 측 골퍼들은 이때 미8군들과 라운드를 했는데 덕분에 미군 PX에서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골프볼‧웨어 등을 구입할 수 있어 큰 행운이었다.

이것은 데커 사령관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훗날 데커 장군은 미국으로 돌아가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했다. 데커 장군이 육참총장 시절 한국에 다시 왔을 때의 일이다. 서울CC를 방문해 회원들과 악수를 주고받으며 그동안의 해후를 나누던 순간, 이를 멈추고 누군가에게 달려가더니 그를 와락 껴안는 돌발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데커 장군이 주한미군사령관 시절 한국아마선수권에서 우승할 때 그의 골프백을 메어준 남자 캐디였다.

 

만능스포츠맨 ‘완전한 골퍼’

 

데커 장군은 만능스포츠맨이었다. 젊은 시절엔 야구, 농구, 미식축구, 볼링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볼링만 하더라도 주한미군 대회에서 우승을 한 바가 있다. 미 육군에서는 45세 이상을 시니어라고 한다. 데커 장군은 이 시니어 골프대회에 출전해서 3회 우승한 전적이 있다.

데커 장군은 미8군 코스가 만들어지기 전 1년 이상을 서울컨트리에서 매주 두 번씩 공을 쳤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때 데커 장군의 제안이 기가 막혔다. ‘내가 나올 때는 미군 중에서 공 잘 치는 골퍼 한 사람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한국 측에선 김정렬 장관이나 합참의장 유재흥 씨가 교대로 나오고 다른 사람은 한국아마추어중에서 잘 치는 분과 함께 나왔으면 합니다.’ 무기를 녹여 골프클럽을 만들었다는 말처럼 전쟁이 끝난 평화시대의 상징이랄까? 이 제안 때문에 당시 골프정객들은 데커 장군과 자주 라운드 한 기회를 갖기도 했었다.

당시 그와 함께한 골퍼들 김정렬 장군이나 유재흥 장군도 데커 장군을 통해 ‘완전한 골퍼’에 접근했다고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로우핸디캡의 플레이어들에게 암시적인 교훈을 남긴 감명 깊은 인물이다.

 

세계 골프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폭제

 

데커 장군의 골프 사랑은 대단했다. 급한 일이 있음에도 동경에서 열리는 극동지구 미군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가 부임했을 때 한국에 하나밖에 없던 서울CC와 데커 장군과의 친근도가 이해가 될 일이다. 서울CC의 초대 이사장인 이순용 씨는 데커 장군이 8군 코스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서울CC의 경험이 있는 인부들을 버스로 태워 미8군코스의 잡초 제거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8군 코스가 탄생하면서 외국의 골프용픔이 국내에 더러 유입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순용 씨는 데커 장군이 서울CC에 올 때 게양대에 국기와 더불어 사성기를 올려 전 회원에게 알리곤 했다. 사성기의 게양은 이순용 씨가 데커 장군을 예우하여 그의 군인이자 외교관의 역할을 고무했던 것이다.

그때의 미 8군 코스는 관리하는 방식이 기계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시약과 비료 등과 기계관리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군대의 코스니까 썩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코스관리 기계화 초기의 8군 코스에서 서울CC의 관리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초창기 우리나라 골프문화는 이순용 씨, 장기영 씨, 박두병 씨 등의 주역과 김정렬 씨 등 후원인사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코스관리면에서 부족한 시설, 기술들이 데커 장군의 등장으로 인해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있다. 동시에 골프의 매너 문제나 기술 문제나 코스의 관리문제 등 전반적인 골프가 데커 장군으로 인해 세계 수준에 오르는 개안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골프의 세계적 수준을 소개한 것이 데커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데커 장군 때문에 미군의 프로골퍼들이 한국에 많이 온 것도 사실이다. 훗날 데커 장군은 미국에 돌아가서 U․S오픈대회에서 우승을 한 오빌 무디도 데커의 영향력에 의해 한국 미8군(상사)에서 근무했고 한국인들과의 교류도 넓힌 것이다. 데커 장군이 한국에 불러들인 미군의 일류골퍼들은 오빌 무디 외에도 여러 명이 있었다. 데커 장군은 사성장군의 세단차에 이들 사병 골퍼들을 스스럼없이 태우고 서울CC를 찾곤 했다. 데커 장군은 덕장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의 한국 골프계가 눈을 뜨게 하는 기폭제가 됐던 데커 장군은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Credit

글 김혜경 사진 골프저널 DB

magazine@golf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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