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골프 140년을 추적하다 : 원산해관에서부터 군자리코스까지 골프장 변천사 ➋
대한민국 골프 140년을 추적하다 : 원산해관에서부터 군자리코스까지 골프장 변천사 ➋
  • 정노천
  • 승인 2023.01.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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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3면이 바다에 연한 조선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동해, 서해, 남해 3곳의 바닷길이 동시에 열렸다. 1883년 조선은 인천, 부산, 원산 3곳의 항을 개항했는데 그 이전부터 청국과 일본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서양세력들의 출몰은 1880년대 개항 시기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부터 외국문물과 서양세력이 휘몰아쳐 왔는데 그들이 갖고 들어온 것 중의 하나가 골프였다. 현재 2022년을 기준으로 볼 때 1880년대부터 따지면 이 땅에 골프 도입의 추론연대는 140여년에 이른다. 당시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이자 일본의 골프사가(史家)인 다카하타(대한암흑기 동양연료회사 이사로 경성 거주)가 자국의 골프지에 발표한 기록을 보면 한국의 골프 발상을 1897년으로 잡고 있다. 

훗날 서양인들이 철수하고 원산시가지를 정리할 때 영국인이 살던 집 다락에서 녹슨 골프채 묶음이 여럿 쏟아져 나왔다고 기록했다. 그 녹슨 채를 싼 포장지가 당시 발간되던 1897년판 신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이미 이 땅의 골프를 논할 땐 골프의 시도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한국 골프의 역사를 논하면서 최초의 골프 도입을 두고 원산해관 내 골프장 존재의 문헌 관계를 따지면서 골프장 유무에만 치중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골프 역사를 인물로 따지자면 이미 덕윤 부사 겸 원산해관 감리로 있었던 윤치호도 있었다. 그는 이미 서양 유학 때 골프를 접했고 그의 집안의 골프 경력을 보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골프장 존재로부터 한국 골프 역사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서울 근교, 경성골프구락부 코스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이 땅의 골프코스가 하나둘 폐쇄됐다. 모든 것이 전쟁물자 생산으로 올인했다. 1941년 군자리코스마저 군사시설로 징발되면서 1943년 3월 이 땅에 마지막 코스로 남아 있던 군자리코스도 폐장되고 결국 전쟁 시설로 전용됐다. 몇몇 페어웨이는 글라이더의 이착륙 연습장으로 쓰이고 나머지 코스는 농경지로 개간되어 ‘식량 증산’을 위해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으로 나눠주었다. 이것이 뒷날 두 번의 전쟁을 겪고 복구과정에서 말썽의 불씨를 낳았다. 소작농민들은 코스의 잔디를 걷어내고 코스를 고르게 다듬고 고랑을 내서 논과 밭으로 전환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성골프구락부는 1944년 3월 19일 오후 10시 군자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20년 동안 존속했던 경성골프구락부 해체를 선언하고 군자리코스의 폐장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해산 당시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은 600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해서 1924년 4월 20일 최초의 골프단체로 결성했던 경성골프구락부가 20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일본 군국주위가 벌인 전쟁에 의해 일본 본토는 물론 강점 하의 조선 골프계까지 그토록 압박받아 희생을 강요당한 예는 6백년 세계 골프사를 통해 비슷한 예가 한 건도 없다. 이야말로 한 맺힌 우리의 골프 수난사가 아닐 수 없다. 

 

원산부터 시작된 지방 골프코스

 

골프 붐은 대도시를 기점으로 전국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1924년 청량리코스가 개장하기 이전에 원산코스와 함께 지방에서도 만들어졌다. 전국에 원산(1924년), 대구(1924년), ㅁ평양(1928년)에 이어 부산코스(1932년)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었다. 또한, 흥남에도 9홀의 코스를 만들었으며 신의주도 코스 후보지였으나 2차 대전으로 중지되고 대신 만주의 안동코스를 이용했다. 

원산해수욕주식회사는 1923년 6월 원산유지의 발기로 천혜의 명승지를 이용해 피서지 및 해수욕장으로서 완전한 설비를 갖추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후원을 받아 설립됐다. 

이 원산해수욕주식회사가 경영에 관여하는 송도원코스는 계획과 동시에 즉시 공사에 착수해 1924년 7월 준공해 지방 골프코스로서는 첫 개장 코스로 통한다. 1924년 8월 3일 원산골프구락부가 조직했다. 여름철 유원지로 개발된 송도원해수욕장 근처에 조성된 원산골프장은 전장 2,127야드, 9홀 코스로 건설됐다.  

이어 1924년 8월 31일 대구 외곽 수성면 대명동 비파산 기슭에 대구골프장이 개장했다. 이 지역은 대한암흑기 일본군 80연대가 주둔하던 서쪽 지역으로 지금은 미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대구코스는 비파산(琵琶山) 일대 약 7만평 부지에 전장(全長) 2,870야드, 9홀 규모, 파 35의 골프코스로 태어났다. 산기슭에 있는 코스에서 멀리 낙동강이 내려다보여 전망이 좋은 위치였다. 효창원코스의 장점을 참고해 코스를 설계했고 4개월이란 짧은 시간 동안 9홀을 완성한 독특한 골프장이다. 

최근 공개된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다른 코스를 만든 단체가 ‘00칸트리구락부’였지만 대구 모임의 공식 명칭은 ‘사단법인 대구골프회’였다. 대구골프회는 코스가 준공되기 전 1923년에 설립됐다.

 

평양코스 클럽하우스

 

평양골프구락부는 주로 철도 관계의 임원에 의해 1927년 5월 조직됐다. 대동강의 넓은 부지에 평양코스를 만들고 1928년 10월 28일 오전 9시 개장식을 했다.

 

평양코스에서 라운드중인 골퍼들

 

1928년 11월 25일 납회경기를 마치고 총회를 열어 재단법인으로 조직을 변경하고 임원들은 선발했다. 평양코스는 명승지를 낀 평양 근교, 의암리에 자리한 전장 2,545야드, 9홀 파33 코스다. 

회원들이 늘면서 9홀 코스를 18개 홀 운영으로 5,310야드, 파66으로 확장했지만 정식 골프코스가 아니라 그린에 두 개의 티를 사용하는 편법을 이용했다. 훗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군부는 즉시 군사적 요새로 코스를 징발해 평양비행장으로 사용했다. 평양코스는 광복 후에도 복구되지는 못했다.

 

부산CC 초창기 해운대 코스

 

젤 나중에 탄생한 곳이 부산골프구락부다. 1932년 2월 8일, 부산부 대청정에 있던 부산은행 집회소(集會所, 지금의 동호회) 안에 구락부사무소가 자리 잡았다. 1932년 2월 26일 오후 7시부터 은행집회소구락부에서 창립위원회를 열었다. 부산의 관민, 특히 금융 및 상공인들이 모여 해변에 시사이드 코스를 건설됐다. 해운대에 9홀, 2,620 야드, 파 33의 평탄한 코스를 건설하고 1933년 10월 1일에 개장했다. 

온천장 덕분으로 항구도시의 골퍼들이 불어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수영천변에 펼쳐져 있던 코스는 일본에 의해 징발되어 페어웨이는 탄약을 실어 나르는 군용 비행장으로 탈바꿈 해버렸다. 1940년 일본 육군이 대륙 침략을 위해 인근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비행장을 건설해 일본군의 후방 비행장으로 개조된 후 영영 복구되지 못했다. 

1941년 일본이 참전한 태평양 전쟁으로 전국에 분포됐던 골프장들도 군사훈련장이나 비행장 용도로 징발됐다. 대구코스(1924년~1942년), 원산코스(1924년~1942년), 평양코스(1928년~ 1942년), 부산코스(1933년~1942년)에 이어 1943년 수도권의 군자리코스(1930년~1943년)가 최후로 폐쇄되면서 한국 골프의 맥은 단절되고 말았다.

1943년부터 1950년까지 7년 기간 동안 한국 골프의 맥이 끊겼다. 한국엔 모든 골프장이 사라져버린 골프 암흑시대를 맞았다. 이로써 외세들이 들어와 이 땅에 만든 골프 시대의 막을 한꺼번에 내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 한국 골프의 침체기와 암흑기를 동시에 맞이하게 된다.

 

한국인이 만든 골프코스 시대 개막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우리 골프장을 만든 것이다. 

1945년 광복이 되고 1948년 정부 수립이 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로 이 땅에 전무한 골프코스를 만들기 위해 복구위원회를 조직해 코스 복구 작업에 돌입했다.

우리 손으로 처음 우리 골프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뜻있는 몇 사람이 국민건강 향상, 외교 친선과 국방의 필요성을 느끼고 황폐된 군자리코스 옛터에 1949년 11월부터 골프코스 복구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서둘러 6개월 만인 1950년 5월경에 군자리코스가 복구됐고 5월 10일 오후 2시 개장식을 가졌다. 

이 땅에서 처음 결성됐던 ‘경성골프구락부’에 이어 광복 후 ‘서울칸트리구락부’를 창설하면서 한국 골프계의 메카이자 총본산 자리인 군자리코스에 한국 골프의 맥을 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로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군자리코스는 보름 만에 또다시 황폐해지고 말았고 그로부터 다시 4년을 기다려야 했다. 주말이면 일본으로 골프 하러 가는 주한미군이나 외교 사절들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한 국방차원에서 국내 골프코스는 필수요건이라고 믿은 이승만 대통령의 신념으로 군자리코스 재건 작업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광복 이후 대통령이 골프장 만들기에 직·간접으로 참가한 셈이고 그러한 지원책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골프의 ‘대부(代父)’격이다.

휴전 직후 1954년에 비로소 군자리코스가 재복구 되면서 한국 골프의 맥은 부활하기 시작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이순용 외자청장이 등장하면서 이 땅에 골프조직을 만들고 군자리코스 재건에 일등 공신이 됐다. 

“자유진영 국가로서 골프장 하나도 갖지 않은 나라가 없다. 이제 우리도 그 골프장을 갖게 됐다. 골프는 심신단련뿐만이 아니라 고급사교는 물론 국제간 외교에도 큰 몫을 한다…” 총회에서 이순용 청장은 말하고 이어 “그런 뜻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에게 골프장 재건의 임무를 맡겼다” 한국 골프의 문화를 만든 이순용 외자청장이 초대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으로 골프계에 등장한 것이다. 

1953년 봄부터 이순용, 장기영、김진형, 김동준 등 18명이 ‘창설 동의회’를 만들고 시대적 어려움을 타개하면서 그해 11월 11일에는 한국의 골프 전반과 군자리코스를 운영해 나갈 한국 골프 대표기구 사단법인 ‘서울칸트리구락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광복 9년 만인 1954년 7월 11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던 군자리 골프코스는 폐장 4년 만에 전장 6,750야드 

파 72의 국제규모를 갖춘 챔피언코스로 재복구됐다. 군자리 코스는 그 자리에서 3번째 개장을 한 기록을 갖게 됐다. 요람기 한국 골프의 끊긴 맥을 잇고 우리나라 골프의 활성화에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 골프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군자리 골프코스를 운영해 나갈 사단법인 ‘서울칸트리구락부’가 창설되면서 다시 한국 골프의 맥을 이어가게 됐다. 그 밖에도 1956년 10월에 부산칸트리구락부가 9홀 규모로 개장했다. 지금의 해운대구 중동 와우산 달맞이고개 자리다. 1942년 세계 2차 대전으로 전투비행장으로 전환하면서 사라진 부산 해운대코스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6년 10월에 만들어졌다. 일찍이 대한암흑기 때 처음 만들어졌던 부산코스가 태평양 전쟁으로 폐장한 뒤 수영코스를 대신해 전장 2,900야드, 9홀(파 36) 규모의 부산칸트리구락부 해운대코스가 두 번째 조성된 것이다. 1958년에는 용산에 미8군 전용의 9홀(나중에 18홀로 확보), 진해에 9홀 군용코스가 이어서 생겼다. 

이러한 정치적 굴곡과 열악한 여건을 돌파해 대한민국 수립 이후 한국 골프계는 제2의 탄생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과거 한국 내 골프계가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또 그들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순전히 한국인들의 손으로 한국인들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한 의미가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1972년 군자리코스

 

하지만 1972년 서울칸트리클럽은 군자리코스를 자라나는 2세 어린이들에게 물려주고 원당의 한양칸트리클럽의 전 주식을 인수하면서 옮겨갔다. 현재 서울컨트리클럽은 한양코스에서 한 지붕 두 가족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GJ 정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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