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원전자 강승구 회장의 일과 골프 : 시대의 흐름을 읽어라
케이원전자 강승구 회장의 일과 골프 : 시대의 흐름을 읽어라
  • 김혜경
  • 승인 2022.05.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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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강 씨 박사공파 장손이자 장남인 강승구 회장

 

충남 천안 백석산업단지 내 사옥에서 K-WON전자 강승구 회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38년간 그 어떤 분야보다 더 치열한 첨단 IT 분야에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10·11·12대 중소기업융합중앙회장을 역임하며 소속 중소기업들의 교류와 융합에 앞장선 기업인이다.

 

어린 시절의 교훈

 

사랑하는 부인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충남 논산 출신인 나는 7남매(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시골 우체국장이셨던 아버지는 진주 강 씨 박사공파 장손이자 장남인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논산중 재학시절 14km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도록 하셨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새벽밥을 먹고 출발해 자전거를 타고 2시간이 걸려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고, 하루 4시간의 자전거 등하교를 통해 기초체력을 기르고 근면, 성실함을 배울 수 있었다. ‘체력 관리가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남보다 일찍 어린 나이에 깨달을 수 있었던 셈이다. 덕분에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 아침마다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아령 등을 하고 계단 오르내리기를 실천하며 일상 속 운동을 실천하고 있고 이는 건강 관리와 골프 실력 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어머니 제사후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과

 

논산 출신이니 당연히 고등학교도 논산에서 다닐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좋은 선배들을 많이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로 진학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공주시에 위치한 공주고를 다녔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주고에 다니기 위해서는 혼자 하숙을 해야 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일찍 독립시켜 자립심을 키우고 더 큰 세상을 보여주기 위한 아버지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공주에서 혼자 하숙을 하게 되니 부모님 그늘 아래서 생활할 때와 달리 혼자 챙기고 결정해야 할 부분이 많아져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업을 시작한 이유

 

대학에선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첫 직장은 금성사 인사부였다. 인사권자의 결정에 따라 필요한 사내 절차 및 대상자와의 일 진행을 하면서 조직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익힐 수 있었다. 

이후 삼도물산 방계회사인 대신통상에 스카우트 되었는데, 막상 회사를 옮기고 보니 적자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 이기만 대표의 지원아래 과감한 구조 조정을 시도하며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고 흑자 전환이 가능하도록 힘을 보탰다. 

대신통상에서 몇 년간 근무하며 경영 실무를 익힌 후엔 1984년 34살의 나이에 광원전자를 설립하며 개인사업에 발을 디뎠다. 어찌 보면 사업을 시작하기에 다소 이른 나이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젊은 시절 나는 ‘인생 5개년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서른 중반엔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었기에 그에 맞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금성사와 대신통상에서의 성공적인 업무 경험을 통해 내 사업을 해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덜컥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대 흐름에 따른 아이템 선정

 

첫 사업 아이템은 당시 인기를 끌던 금성(현 LG전자)의 골드스타 비디오를 생산해 납품하는 것이었다. 이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무선통신에 들어가는 전자부품 등을 개발 공급해왔다. 또 2000년에 K-WON전자로 거듭나면서 디지털 시대의 빠른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세계 시장에서 음향기기, 무선통신기기 핵심 부품을 연구 개발한 결과,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라믹, 트리머, 습도센서, 가스센서, 형광체와 같은 부품을 개발해 높은 품질과 경쟁력 있는 가격에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첨단 IT 분야에서 입지 구축하기

 

지금은 추억이 된 무선통신기 삐삐, 거치식 핸드폰 충전기를 생산한 바 있고, 초창기에 MP3를 개발해 공급하기도 했다. MP3의 경우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자사가 개발한 MP3를 들고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으나, 시장 조사를 해보니 우리나라처럼 인터넷이 발달해있는 나라가 거의 없어 파일을 다운받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어서 큰 자금이 투자된 사업이었지만 깨끗하게 포기했다. MP3 생산에 올인했던 경쟁회사들이 도산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MP3 생산을 중단한 것은 냉철한 판단이었던 셈이다. 

사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 보다 접는 것이 더 어렵다. 시장 흐름을 파악해서 아니다 싶을 때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시장 변화에 대응하는 빠른 결정이 경쟁이 치열한 첨단 IT 업종에서 입지를 구축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반 수출 100만불, 2006년 1천만불, 2007년 2천만불을 돌파했고 2017년에는 수출 3천만불을 훌쩍 뛰어넘은 알짜배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K-WON전자를 휴대폰 액정 모듈을 소재로 한 R&D사업 분야에서 연매출 584억원에 3천만불 수출업적을 이뤄낸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시장을 예측하는 눈과 뚝심과 의지가 밑바탕이 된 것 같다.

 

위기 그리고 기회

 

 

물론 38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많은 회사가 줄줄이 부도가 나던 IMF 시기(1997년)에는 오히려 수출에 주력했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큰 수익을 얻었지만,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의 합병(2001년), 키코-리먼브라더스 사태(2007년)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1년에는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의 합병으로 빠른 대출 상환이 불가피하게 되면서 자금줄이 막혀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2006년에서 2007년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마케팅이 된 상품으로 키코(KIKO:Knock-in Knock-out의 약자)라는 녹인 옵션과 녹아웃 옵션이 결합된 상품이 있었는데 당시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가입했던 키코는 녹인 콜옵션 2계약 매도, 녹아웃 풋옵션 1계약 매입구조로 되어있어 쉽게 말하면 환율이 900원 이하로 떨어지면 계약은 무효가 되고, 1,050원 이상이 되면 은행에 달러를 되팔아야 하는 구조였다. 

문제는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고 900원대였던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게 된 것이었다. 키코에 가입했던 우리 회사도 큰 손실을 입으며 또 한 번 위기를 겪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며 방법을 강구한 것이 오늘의 K-WON전자를 만든 것 같다.  

후배 경영인들에게 “회사를 경영함에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더욱 냉철한 판단력을 갖추게 된 전력 덕분이다.

 

사업 다각화를 꾀하다

 

시대의 변화를 읽는 것은 경영인이 갖춰야 할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론에 따라 K-WON전자를 모기업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자회사인 광원을 통해 NFC와 블루투스를 결합한 새로운 모바일 결제서비스 엠터치(MTouch)를 개발해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핀테크와 PG 사업을 담당하는 케이원 PS, 친환경 에너지 쪽에 중점을 둔 2차 전지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는 티에스식스티즈, 전기 자동차에 들어가는 셀아세이 케이스를 생산해 삼성 SDI에 납품하는 광원전자 외에 S.I.T 사출공장, 나노소재와 IT를 접목한 사업에도 진출해 활발히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배터리 사업의 경우 전기자동차뿐만 아니라 열차 객차 배터리, 골프 카트 리튬이온 배터리 등을 만들어 틈새시장을 공략 중이다. 티에스식스티즈가 생산하는 2차 전지 배터리는 5월 24일 출시되는 캄보디아 최초 전기자동차에 탑재돼 시장 확대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 진출해 배터리 사업을 확장해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경쟁력과 앞으로의 비전

 

 

치열한 IT 분야에서 성장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기술의 진화에 발맞춰 IT 융합기술 등의 최첨단 기술 개발에 힘을 쏟은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이다 보니 차별화된 기술력을 갖추게 되고 그것이 생산으로 이어져 38년째 첨단 IT 업계에서 건승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시대 흐름에 맞춘 첨단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K-WON전자만의 융합기술을 다각도로 개발해 제품에 적용하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차별화되고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하고 싶다. 또 기업은 이윤추구라는 불변의 목표가 있지만 더불어 사회와 함께 융합하고 상생할 수 있는 공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으로 기억되고 싶다.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하고, 굿네이버스를 통한 후원, 우크라이나 난민 돕기 자선기금 기부 등을 통해 사회적 나눔을 이어오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내겐 너무 특별한 중소기업융합중앙회

 

 

사업 외에 사력을 다해 활동한 단체로 중소기업융합중앙회가 있다. 1989년 전후해 일본에서 처음 도입된 기업 융합의 역사는 대덕 이업종교류회를 시작으로 국내에 짧은 시간 내에 정착됐고, 1994년 서로 다른 업종 회원 기업 간 교류 활동을 통해서 다른 기술과 지식을 체계적으로 융합해 국가경제 발전에 공헌코자 전국 단위의 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중소기업융합중앙회의 전신)가 설립됐다. 이후 2011년 10월 산업융합촉진법이 발효되면서 중소기업이업종중앙회 및 지역연합회가 중소기업융합중앙회 및 지역연합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현재 중소기업융합중앙회는 교류와 융합을 통한 혁신성장의 가치 아래 전국 13개 지역연합회와 미주, 유럽, 아시아 지역으로 구성된 해외연합회 등 6,600여 개의 글로벌 융합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나는 1984년 광원전자라는 기업으로 기업활동을 하던 중 이업종교류회에 가입했고 다른 업종과의 기술교류와 융합을 통해 기술융합의 필요성과 가치를 실감하게 됐다. 이 일을 통해 중소기업융합중앙회와의 인연이 더욱 깊어져 중소기업융합 대전세종충남연합회 회장, 중소기업융합중앙회 수석부회장직을 맡아 수행했다.    

이어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10·11·12대 중소기업융합중앙회의 수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중소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서로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 대표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체득한 경영 노하우, 전문 기술, 인적 자원 등을 교류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방향을 제시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소기업융합대전과 네트워크법

 

 

타 경제단체에서도 활동해봤지만, 중소기업융합중앙회의 경우 전국 회원사 CEO들의 협력으로 사단법인화해서 전국 규모의 실질적인 조직화를 이뤄냈고, 단위교류회를 통해 매월 교류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며 개별 역량을 강화하는 등 기업 간 융합교류를 전파하는 최일선의 경제단체라는 것이 자부심이다. 

2016 중소기업융합대전을 앞두고 단체 설립 이래 처음으로 대통령 표창 등 정부 포상제도를 도입시켰으며, 해외 빅바이어 50여 명과 해외 경제단체들도 초청해 행사의 격을 높였다. 특히 윤영석 의원을 통해 국회에 협업에 관한 법률인 네트워크법 도입을 발의해놓은 상태로 이 법이 제정되면 세계 한상과의 교류에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 협회의 위상이 한층 향상될 것이다. 이 법은 기업 간 협력을 위한 표준계약서 제공과 정부 차원의 공증, 분쟁 발생 때 조정과 각종 세제 지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실제 기업 간 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참여대상 기업 발굴의 어려움과 기업 간 이해 조정 실패로 인한 분쟁, 협력에 대한 성과물의 이윤 분배 문제 등에 직면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발의된 법안이다.

 

 

중소기업융합중앙회장직을 수행하며 가장 주력한 것은 국제적인 네트워크 만들기이다. 국내 기업 간의 교류 및 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 한상들과의 교류를 통해 회원사들의 해외 진출에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힘썼다. 2016년 중국상업연합회(China General Chamber of Commerce) 홍콩과 글로벌 네트워크 체결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미주 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와 업무제휴를 맺은 데 이어, 2017년에는 세계한인무역인협회(OKTA)와 MOU를 체결했으며, 70개국 160여 개 그룹으로 이뤄진 세계무역협회와 단위교류회가 네트워크를 맺는 일에도 앞장섰다.

 

인생, 사업과 닮은 골프

 

골프는 강 회장의 활력소이다.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휴식이 된 것은 단연 골프였다. 골프를 통해 가끔은 대자연 속에서 라운드를 즐기며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맥도 쌓을 수 있었다. 1992년에 고교 20년 선배의 권유로 골프에 입문하고 연습장에 5개월 다닌 후 유성CC에서의 첫 라운드에서 108타를 쳤다. 그때 동반자들이 첫 라운드 치고 무척 잘한 거라고 응원해주었다. 

사실 2년 만에 싱글(1994년 우정힐스, 79타)이 되고 홀인원, 사이클버디를 할 정도로 골프에 소질을 보였었다. 

하지만 스코어에 연연하며 골프를 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플레이에 임하다 보니 잘 치는 사람을 만나면 스코어가 좋고, 잘 못 치는 사람과 라운드를 하면 같이 스코어가 동반 하락하는 징크스가 생겼다. 

내 골프가 없어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동반자의 눈높이에 맞춰 배려하는 마음으로 골프를 치다보니 언제나 인기 있는 필드 동반자가 되었고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골프는 인생과도, 사업과도 닮은 것 같다. ‘너무 욕심을 내도 안 되고, 노력을 안 해도 안 된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꾸준히 열심히 하다 보면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내가 골프와 인생, 사업 이 3가지를 통해 터득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에 따라 앞으로도 매사에 너무 욕심내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GJ 김혜경 이미지 강승구, 중소기업융합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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