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주에서 황태자로 위풍당당 노승열
유망주에서 황태자로 위풍당당 노승열
  • 남길우
  • 승인 2014.06.0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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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주에서 황태자로
威風堂堂 노승열
 
노승열(23·나이키)이 크게 사고를 쳤다! 그것도 날고 기는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는 PGA 무대에서 말이다.
노승열은 지난 4월 28일(한국시간), 미국 루이지애나 TPC(파72·7,399야드)에서 열린 PGA투어 취리히 클래식 마지막 날 최종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단순한 유망주던 그가 미국 무대에 도전한지 2년 만에 활짝 날개를 편 셈이다.
글 | 최민석 기자, 사진제공 | 나이키골프코리아
 
한국 선수 역대 최연소 우승
노승열이 미 PGA투어 무대에서 첫 승을 기록했다. 그 무대는 미국 루이지애나주 애번데일의 루이지애나 TPC에서 4월 25일(한국시간)부터 4일간 개최된 취리히 클래식이다. 대회가 열린 첫날,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모자 옆에 노란 근조리본을 달고 경기에 참가한 노승열은 침착하게 자신의 경기를 펼쳤다. 1라운드 65타, 2라운드 68타, 3라운드 65타로 큰 실수 없이 선두권을 달리며 순항하던 그는, 마지막 날 4라운드 1번 홀에서 보기를 기록하며 흔들릴 법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경기를 진행했다. 결국, 버디 4개와 보기 3개를 묶어 1언더파 71타를 치며 최종 스코어 19언더파 269타를 기록한 노승열은 공동 2위의 앤드루 스보보다, 로버트 스트렙(이상 미국·17언더파 271타)을 2타 차로 앞지르며 왕좌에 올랐다.
이번 우승은 의미가 깊다. 한국 선수로는 최경주(44·SK텔레콤), 양용은(42·KB금융그룹), 배상문(28·캘러웨이)에 이어 PGA투어에서 우승을 차지한 네 번째 골퍼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상문이 지난해 기록한 한국인 최연소 기록도 갈아치웠다. 노승열은 이번 우승으로 한국선수 중 최연소(22세 11개월) PGA투어 우승자로 기록됐다.
이번 우승으로 챙기게 된 상금은 무려 122만 4천 달러. 한화 12억 7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혜택은 또 있다. 5월 8일 개막하는 ‘제5의 메이저대회’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과 8월 7일 열리는 PGA 챔피언십 출전권, 2015년 마스터스 출전권 확보는 물론 2015~2016년 시즌까지 PGA투어 출전을 보장받게 됐다.참고로 노승열이 우승한 이번 대회는, 우리나라와 유독 연이 깊다. 
컴팩클래식으로 불리던 2002년에 최경주가 미국 PGA 역사상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연이 닿은 대회이기 때문이다.
 
 
노력형 골프신동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골프를 시작한 노승열은 어려서부터 골프신동으로 불리며 자랐다. 그 바탕엔 천재성을 능가하는 노력이 있었다. 주변에선 그를 골프채를 잡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노력형 골퍼라고 일컬었다. 그의 노력과 천재성이 뒷받침된 결과는 승승장구였고, 또래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2003년 한국주니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처음으로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됐다. 14살이 되던 2005년에는 허정구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에서 13언더파 275타로 우승을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5세이던 2006년에는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골프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기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밀려나며 처음으로 시련을 겪었다. 생각지도 못한 탈락이었기에 충격이 컸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프로가 되기로 한다.
프로가 된 뒤에도 나이제한(만 18세 이상)으로 KPGA투어에 참가할 수 없었던 그는 2008년부터 아시아프로골프투어(APGA)에 참가한다.
아시안투어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주로 대회가 동남아시아 무대인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마땅히 캐디를 할 사람이 없어 아버지가 백을 메고 캐디를 자처했다.
다행히도 일찍 꽃을 피웠다. 2008년 아시안투어 미디어차이나클래식에서 정상에 올랐고 그해 APGA투어 신인왕도 차지했다. 2010년에는 아시아투어와 유러피언투어가 공동으로 개최한 메이뱅크 말레이시안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우승 당시 아시아투어 최연소 상금왕을 달성함과 동시에 18세 282일로 뉴질랜드 교포 대니 리(18세 213일·2009년 조니워커클래식 우승)가 보유하고 있던 유러피언투어 최연소 우승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우승하는 방법을 모르던 시절
승승장구하던 노승열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좌절의 시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대회가 2008년 APGA 자격으로 참가한 GS칼텍스 매경오픈과 2012년 코오롱 한국오픈이다.
두 대회 모두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둘 다 우승에는 실패했다. 특히 2012년 한국오픈에서는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날 양용은에게 10타 차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한국남자골프 역사상 최다 타수차 역전패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당시에는 우승하는 방법을 몰랐다던 노승열도 두 대회를 계기로 더욱 단단해졌다.
꿈의 무대에 입성하다
아시아와 유럽을 휩쓴 노승열은 비로소 2012년 미국 PGA투어의 문을 두드렸다. 퀄리파잉스쿨을 통과하며 출전권을 따냈다. 꿈의 무대인 PGA투어만을 바라보며 방황했던 나날들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큰 무대답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12년 PGA투어 28개 대회의 출전한 그는 톱10에 3회 올랐고, 특히, 2012년 AT&T 내셔널에서는 공동 4위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음해에는 심각한 부진의 늪에 빠졌다. 2013년에 참가한 25개 대회에서 13차례나 컷 탈락을 경험했다. 상금랭킹 153위까지 밀리며 PGA 투어 시드를 잃을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마지막 기회였던 2부 투어인 웹닷컴투어 파이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5명까지 주어지는 출전 티켓을 따냈다. 그리고 올해 PGA투어 78번째 출전인 취리히 클래식에서 비로소 우승컵을 들 수 있었다.
 
 
‘루키’에서 ‘챔피언’으로
“아직 우승을 예상할 수는 없어도 반드시 우승해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이 말은 노승열이 취리히 클래식 최종라운드에 들어가지 직전에 한 다짐이다.
자신의 다짐을 그대로 실천한 그는 세월호 사태의 아픔이 가시지 않은 조국에 위로의 우승컵을 건넸다.
우승을 결정지은 후에도 별다른 세리머니 없이 담담히 우승 순간을 맞이한 그는 세월호 피해지원을 위해 5000만원을 기부하는 씀씀이도 보였다.
실력만큼이나 챔피언에 어울리는 인성을 갖춘 그는 지금 기세라면 최경주가 기록한 8승을 넘어 한국인 최초 PGA투어 두 자릿수 승인 10승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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