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을 넘어선 골프 영웅 : 리 엘더
인종 차별을 넘어선 골프 영웅 : 리 엘더
  • 나도혜
  • 승인 2022.01.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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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11월 28일 1975년 흑인 골프 선수로는 최초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 출전했던 리 엘더(미국, 1934.7.14 – 2021.11.28)가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그가 골프 역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조명해본다.

 

흑인 선수 최초로 마스터스 출전한 리 엘더

 

 

스코틀랜드 양치기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는 골프는 미국에서 그 꽃을 피웠으나 백인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심한 스포츠 중의 하나였다. 

1948년 미국프로골프(PGA)에 진출한 찰리 시포드(미국)는 통산 2승을 거두었으며 인종 차별을 극복한 흑인 골프 선수다. 최초의 흑인 메이저 리거였던 재키 로빈슨(미국)에 빗대어 골프계의 재키 로빈슨으로 불렸으며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이 최초로 찰리 시포드를 기념한 상까지 제정했다. 

찰리 시포드와 더불어 골프에서 인종 차별의 벽을 깨고자 노력한 선수로 1975년 흑인 골프 선수 최초로 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 출전한 리 엘더(미국)가 있다. PGA 투어에서 통산 4승과 시니어 투어인 챔피언스 투어에서 8승 등 12승의 승수를 올렸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출전하면 살해를 한다”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마스터스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좋은 골퍼로 기억되고 싶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골프클럽의 설립자인 바비 존스(미국)는 “골프 선수는 백인이어야 하며 캐디는 흑인이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며 오랜 시간 동안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 바로 PGA 투어 시즌 첫 번째 마스터스 대회를 주관하는 오거스타 내셔널이었다. 

흑인 회원을 받아들인 것도 1990년이며, 여성 회원은 10년간 여권운동 단체의 끈질긴 투쟁으로 2012년에야 회원 가입이 가능해졌다. 비록 아마추어 대회이긴 했지만, 오거스타 내셔널골프클럽에서 여자골프대회를 개최한 것도 2019년이 처음이다. 

골프계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리 엘더와 찰리 시포드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호텔에 숙박하는 백인들과 달리 두세 군데에 숙소를 잡아 살해 위협을 피하기도 하며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잠을 자야 하는 차별을 견디면서 이룬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사실 리 엘더는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마스터스 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흑인 골퍼’라는 타이틀보다는 ‘좋은 골프 선수’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 그는 몬샌토 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따낸 출전권으로 1975년 마스터스 대회 참가 이후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모두 여섯 번 마스터스에 출전했다. 주변의 비하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대회에 참가했으며, 1979년에는 미국과 유럽 골프 대항전인 라이더컵에 흑인 최초 미국 대표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캐디에서 프로골퍼까지

 

1934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태어난 리 엘더는 9살 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독일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며 어머니 또한 3개월 후에 사망했다. 12살부터 이모와 함께 살던 그는 프로샵과 락커룸에서 일을 하면서 캐디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골프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연습을 했으며 골프 강사였던 테드  로즈(미국)의 지도로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어 25살의 늦은 나이에 군대에 징집되었으나 열렬한 골퍼였던 부대 지휘자에 의해 골프를 칠 수 있는 부서로 배치되는 행운을 잡았고 여기서도 골프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당시 PGA에는 백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61년 군대에서 제대한 엘더는 흑인 골프 선수들을 위한 UGA( United Golf Association)에 합류 했다.

 

잊지 못할 잭 니클라우스와의 서든데스

 

1968년에야 PGA투어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며 상금 순위 40위를 차지할 정도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리 엘더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이목을 받은 대회는 바로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열린 아메리칸 골프 클래식이었다. 

당시 신인이었던 그는 골프의 거장 잭 니클라우스(미국)와 우승을 놓고 연장 승부를 겨루게 됐고, 서든데스 5번째 홀에서 안타깝게 패배했지만 리 엘더의 과거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이날의 승자는 엘더였다. 이 이후로 그는 여러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1971년 나이지리언 오픈에서 우승을 거뒀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오픈, 남아프리카공화국 PGA 챔피언십까지 출전했다.  

리 엘더는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1974년에는 장학 기금까지 조성해 재단을 설립했으며, 골프 선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했다. 

 

인종 차별의 악습을 깬 리더

 

현재 PGA 투어에서는 재능 있는 한국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하며 우승을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태국 등 많은 아시아계 선수들도 우승을 다투고 있지만 불과 50년 전이었다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과거 상류층, 귀족, 부자들의 고급 스포츠로 알려져 있던 골프는 리 엘더나 찰리 시포드 같은 선수들의 노력으로 대중화에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1997년 타이거 우즈의 유색 인종 최초 마스터스 우승의 가치가 더욱 빛이 나는 것이며, 우리가 PGA 투어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을 응원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GJ 나도혜 사진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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