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CC와 5.16 군사 쿠데타
서울CC와 5.16 군사 쿠데타
  • 강인구
  • 승인 2021.05.1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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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CC의 탄생과 그 뒤안길 연재 ➎

 

1954년 군자리코스 7번홀

 

“역사는 유동적이며 문제투성이인 담론이다. 겉보기에 이는 세계의 한 단면인 과거에 관한 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얽매어있는(대체적으로 월급을 받는) 연구자 집단이 만들어 낸다. 이 연구자들은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와 실천적 측면에서 일정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이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생산품은 일단 유통되면 논리적으로 무한히 이용되고 남용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것은 주어진 일련의 권력 토대에 부합되고 지배·주변의 스펙트럼을 따라 역사의 의미를 구조 지으며 유포시킨다.”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1991) 

 

프롤로그

“...이상과 같이 6.25사변의 원인이 주로 대한민국 정부의 부패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다시 정쟁하지 말고 올바른 민주정치를 하여야 할 터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독재권과 영구집권을 위해 아부하는 무리로써 자유당을 조직하고 부산의 정치파동을 위시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2.4 파동, 3.15 부정선거 등 갖은 불법과 비행을 자행하고 중요한 기업체는 모두 정상배에게 농단되어 국고의 손실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청탁과 뇌물이 공행(公行)하고 깡패와 날치기가 백주에 횡행하여도 이것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을 조장해 정권 유지와 이권 획득에 이용해 사회는 그야말로 부패 부정의 도가니로 화(化)하였다….
지금 박 의장이 영도하는 혁명정부는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간첩 침략을 분쇄하고 용공주의자를 색출해 철저한 반공정책을 실천하는 동시에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하여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고 있으며 자립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경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산업을 일으키고 있으며 8.12 성명을 통해 명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을 복귀시키겠다고 하였으니 대한민국의 전도(前途)는 실로 양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혁명대열에 뛰어들어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신석호, 「반공특집:6.25와 우리 민족의 방향」, 『최고회의보 9』, 1962)

 

일제 때 조선총독부 부설로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에서 16년간 재직한 신석호는 해방 후 미군정 통치하 신설된 문교부 내 국사관 부관장으로 임명됐다. 
국사관장은 문교부장 유억겸이 겸임했다. 1950년 6월에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에 재임하고, 1951년 4월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1962년 당시까지 현직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직은 문교부 장관이 겸직했다.

 

서울CC의 구황실 소유지 임차계약 기한

 

1954년 발급된 사단법인 인가증

 

이승만 정부 말기에 가서야 서울CC의 골프장 부지 분쟁은 타협점을 찾았다. 서울CC는 재판에서 승소한 농민 측에 대한 ‘경작권’을 보상해야 했고, 골프장 부지의 소유권을 가진 구황실재산사무총국(1955년 6월 구황실재산관리국에서 개편)으로부터 그 부지에 대한 임대차 계약을 보장받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은 요즘 LH공사처럼 부패한 관료주의 소굴 같았다. 1959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엉망진창인 구황실재산관리”라는 제목으로 가짜뉴스 아닌 팩트를 보도했었다.

 

“국회재정경제위원회는 28일 하오(下午) 구황실재산관리국(구황실재산사무총국의 오기:필자)에 대한 국정감사를 실시하였는데 윤우경 사무총국장은 그 권한을 전단(專斷)하여 총 3만 1천여 건에 달하는 토지를 임의로 임대하되 그 가격을 극히 저렴하게 하여 국고금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재산관리 출납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아 부정사실을 명백히 밝혀냈다 한다. 재경위원들은 윤 국장이 91년도(1958년:필자)에 평당 시가 약 5천 환의 평지임야 7만여 평을 평당 250환에 불하하고 평당 시가 약 1만 환의 평지임야와 대지 약 2만 9천여 평을 평당 2천 4백 환으로 수의계약한 사실도 적발하였다 한다….”

 

1959년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귀국 인터뷰
1957년 이순용 이사장 재직 시 발행된 서울CC 개인 회원증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와 미국행 정치 망명은 서울CC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1960년 6월 4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급작스럽게 이순용 이사장의 사퇴서가 제출됐고, 1주일 뒤 정기총회에서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초대 이순용 이사장을 이어 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1960년 6월 15일 개정헌법이 통과되어 의원내각제가 채택됨으로써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이 선출되었다. 제2공화국은 4.19 혁명의 산물인 의원내각제 정부의 시작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발발까지 1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고 단명했다.

 

제2회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시상식

 

1960년 가을 서울CC에서 골프장 개장 원년부터 시작된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최초의 한국 아마추어골프 대회로서 상징성을 가진 <대통령배>는 제2공화국에서 지속되지 못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배’ 타이틀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로 존속됐고, 2003년부터 <허정구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군자리골프장 부지에 대한 경작권 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서울CC는 농민들에게 평당 500환씩 1억 1천만여 환의 ‘보상금’을 분할해서 주기 위해서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우선적으로 서울CC 예산과 은행 부채 등으로 지불됐고, 나머지 자금 마련은 약 100여 명의 회원으로부터 2년 내 반환을 전제로 1백만 환씩을 갹출했다고 한다. 만약에 당시 약정된 지불 일자를 지키지 못하면 앞서 지불된 보상금도 무효처리되는 난제였을 뿐만 아니라, 농민 측에 보상이 완료되어야만 정부와의 골프장 부지 임차계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서울CC가 정부와 체결한 임차기한은 1954년 11월부터 1963년 6월까지였다.

 

군자리 골프장과 5.16 군사쿠데타

 

1962년 박정희 최고회의장 문화재관리국 업무보고 청취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성동구 능동(현 광진구 능동로)에 위치한 군자리 골프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싸했다. 당시만 해도 골프를 한다면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절 아닌가? 젊은 정치군인들이 골프를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다수는 골프를 죄악시하거나, 백안시하여 한때 골프 치는 사람을 내쫓기까지 했다고 한다. 제7회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신용남 대한국민항공사(KNA) 사장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5.16 쿠데타 당시 서울에 골프장이라고는 물론 서울CC 군자리 코스뿐이었다. 골프장이라는 넓은 뜰에서 이상한 연장을 휘두르며 하얀 볼을 치는 유한 실업인들이 쿠데타 주체의 대령, 중령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눈에 아니꼽게 비쳤던 모양이다. 최고 군사 통치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서울CC의 ‘공놀이’가 의제에 올라 ‘경제 부흥에 매진해야 할 때 골프장이 왜 필요한가? 골프장을 갈아엎고 콩 등을 심기로 하자’하여 폐쇄키로 의결된 것이다. 물론 이에 당시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의사봉을 ‘탕탕’ 쳐서 결정되고 만 것이다.” (신용남, 『골프 교우 50년』)

 

하지만 1950년대에 군자리 골프장에서 공을 치던 군 장성들이 적지 않았다. 김정렬 전 국방 장관과 유재흥 전 합참의장 등은 서울CC 친목 단체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 김정렬은 1952년 12월에 군사사절단장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유엔군사령부에 파견됐는데, 당시 한국은행 동경지점장으로 파견 나와 있던 유창순의 권유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김정렬은 도쿄에 있는 고가네이(小金井)CC 회원에도 가입했다. 유재흥은 1953년 미국육군참모대학에 유학 갔을 때 골프를 배웠다. 그가 돌아와 보니 벌써 군자리 골프장이 문을 열었었다.

 

“나는 교육총장으로 부임했는데 거기서 근무하는 미국 고문 중에 프로골퍼가 한 분(대위) 있어 비행장에 있었던 간이골프장에서 그와 자주 골프를 쳤어요. 그래서 내 실력이 늘어서 금세 핸디 18이 되더군요”라고 추억하고 있다. (신영수, 『한국골프의 요람기』)

 

1962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대한상공회의소 방문

 

1950년대 말 서울CC 회원 명단에 등록된 한국군 장성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강영훈 육군중장, 김대식 해병대사령관, 김용우 전 국방장관, 김창규 공군참모총장, 박건원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백선진 국방부 차관보, 백선엽 육군대장, 손원일 전 국방장관, 신성모 전 국방장관, 신응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원용덕 헌병사령관, 유재흥 육군 중장, 이병희 해군본부 경리국장, 이용운 해군중장, 이종순 공군본부, 이형근 육군대장, 이희정 해군사관학교장, 임선하 육군중장, 장덕창 전 공군참모총장, 장도영 육군중장, 정경모 전 해군참모총장,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 최경남 육군준장 정도였다. 여기 명단의 출처는 그 당시 서울CC 이사였던 신영수 연합신문 경제부장이 나중에 회고록처럼 편저한 『한국골프의 요람기』에 부록으로 첨부한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의 골프장을 불도저로 갈아엎자는 결정을 막아준 사람은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설치가 공포됐다. 『경향신문』 1963년 6월 11일자를 보면, 당시 군사정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신종 권력 구조를 채택해 극단의 권력 집중적인 <최고회의>를 설치해서 입법권과 행정권을 집중시켰다고 평가했다. 
당시 지방 출장이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뒤늦게 그 결정을 알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서 “지금 형편으로 골프장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있는 것을 왜 없앱니까? 앞으로 우리나라도 세계 추세에 따라서 많은 골프장이 개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중에는 열심히 경제 건설하고 주말에는 자기 취미대로 운동을 즐겨야 할 터인바, 하나 있는 서울CC는 남겨놓아야 합니다. 많은 외국인이 와서 우리 근대화 추진에 협력하게 될 터인데 그들이 즐기는 골프장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진정했다고 한다. (「진정한 골프인 김종필」, 운정재단 JP아카이브) 
김종필 중정부장의 골프 입문은 5.16 직후 어느 날 급한 대로 미8군 사령관 멜로이(Guy S. Meloy Jr.)에게 부탁해서 골프채 한 세트를 구해서 김정렬, 장지량, 김신과 함께 군자리 골프장에 나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날 그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드라이버를 들고, 김정렬 전 국방장관에게 간단히 그립 잡는 방법만 배우고 라운드를 했다고 회상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해서 대통령제로 되돌려 놓은 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대선을 주관한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를 모방해 설치한 중앙정보부는 엘리트들을 대거 동원해 정책개발과 구(舊)정치인들을 포함한 정당 결성에 주력했다. 유감이지만 신석호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의 바람처럼 ‘혁명정부가 영도하는 대한민국의 전도(前途)’는 만만치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정당 결성과 대통령 선거를 위해 필요한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권 파동이라고 불리는 주가 조작사건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조성해 큰 사회적 물의를 초래했다. 게다가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파친코 사건 등에도 깊이 연루됨으로써 소위 4대 의혹사건이 불거져 구악 대신 신악이 등장했다고 비난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오일륙(5.16))

 

군자리 골프장 부지와 박정희 정부의 국유지 불하

 

1963년 6월 서울CC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국회 문공위원회, 문화재관리국(1962년 10월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개편) 등에 공문을 보내서, 그동안 체납된 군자리 골프장 부지에 대한 임차료를 농민들에게 지불한 ‘보상금’ 1억 1천만여 환으로 상쇄시키고 그 부지를 무상으로 양도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1년 전 1962년 6월 10일부터 화폐개혁에 의해서 구 환화 대신에 원화의 비율이 10:1(10환→1원)으로 평가절하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의하면, 군사정부의 응답은 문화재관리국을 통해 성동구 능동에 위치한 골프장 부지의 국유재산 불하를 일반 공개입찰로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CC 집행부는 1963년 12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장 정문순(육군준장 예편)에게 능동 골프코스 부지를 농지 분배가격으로 매각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마지막 카드’로 던졌다고 한다. 
1964년 초 서울CC는 새 정부에서 개편된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국유재산 매수원서’를 제출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1963년 12월 17일 정식으로 박정희 최고회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해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군사정부는 2년 7개월 만에 일단 종료됐다. 
정문순 문화재관리국장이 유임된 상황에서 능동 골프장 부지 불하건은 새 국면에 돌입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서울CC 측에 골프장 용지를 불하해 줄 테니 그동안 밀린 임차료를 완납하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서울CC가 요구한 ‘농지분배 가격’으로 매각하는 방식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때 또다시 ‘국공유지 부정불하사건’이 터져 나왔다. 역시 이번에도 문화재관리국장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구황실재산 부정불하’ 등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지만, 항소하고 검찰이 불복 상고해서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혐의가 없다고 석방됐다. 어쨌든 박정희 정부의 군자리 골프장 부지문제에 대한 첫 입장은 ‘국공유지 불하’ 방식으로 낙찰됐다. 
1964년 5월 말 군자리 골프장의 개장 10주년을 맞이한 서울CC는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때는 서울CC 장기영 이사장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등용된 다음에 열리는 이사회였다. 
이날 서울CC 집행부는 박정희 정부의 실세인 김종필 공화당 의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비롯한 81명이나 되는 신규회원들의 가입을 한꺼번에 승인했다. 당시에 장기영 이사장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기 전부터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함께 한일협정을 위한 대일 막후교섭을 일찍부터 주도하고 있었다. 
한편, 서울CC 코스 부지의 불하건은 지체되고 있었지만, 그해 가을에 한국 골프계의 도약 단계를 알리는 신호탄이 올려졌다. 한양CC가 조봉구와 민병도를 대주주로 하는 한양관광주식회사를 모회사로 새롭게 건립됐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리에 자리 잡은 한양CC 코스는 처음에 전장 6,716야드, 파72였다.  
결국, 서울CC의 능동 골프장 부지를 불하받는 오래된 숙제는 장기영 이사장 때 해결을 보지 못하고, 1965년 4월 말에 선출된 제3대 이사장인 박두병 동양맥주(현 OB맥주) 사장에게 승계되었다. 당시 정부는 <국공유재산처리임시특례법>에 근거해 국공유 재산에 대한 점유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수의계약에 의해 불하해주는 특전을 시행하고 있었다. 
서울CC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골프장 부지를 불하받기 위해서, 6월 초 박두병 이사장이 고범준 전무이사와 함께 문화재관리국을 직접 방문해서 연체된 임차료 2,950,000원을 완납하고 정식으로 부지 매수원서를 제출했다. 그때까지 서울컨트리클럽은 2년이 넘도록 임대차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7년째 임차료도 체납한 상태였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GJ

 

 

By 강인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진 서울CC,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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