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저널 30년 특집] 혀를 끌끌 차며, 힘든 일하는 줄만 알았던 조선시대 골프
[골프저널 30년 특집] 혀를 끌끌 차며, 힘든 일하는 줄만 알았던 조선시대 골프
  • 이동훈
  • 승인 2019.01.03 07: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9년 8월 창간호(v.1)

 

우리나라가 일백 년에 가까운 골프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다른 스포츠 역사에 비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19세기 말 원산골프장을 시작으로 50여 개의 골프장이 건설되고, 70여만을 헤아리는 골퍼(*1989년 9월 기준)가
이 땅에 정착하게 되기까지 한국 골프사의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어온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우리나라 골프 문화의 형성과 발전의 길을 모색해 본다.

 

19세기 원산골프장 건설

 

우리나라의 골프 역사는 어언 1세기에 달한다. 골프 유입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 운요호 사건이 불씨가 되어 맺어진 강화도 조약(1876년 고종 13년)의 체결로 부산, 인천, 원산항의 개항과 함께 청나라의 주선으로 영국인이 원산항에 들어오게 된다.

영국인이 원산에 들어오게 된 것은 당시 조선 정부가 관세 징수 업무를 청국에 위촉했는데 청국에서는 영국인들을 불러들여 관세 업무를 관장토록 한 때문이다. 당시 원산 세관에 근무했던 영국인의 숫자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세 사람만 모여도 골프장이 필요하다는 영국인들이 원산에 거주하면서 원산 세관구내에 골프장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초의 원산골프장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이나 문헌으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그 당시 원산의 세관 근처에 살던 사람들의 구전으로 원산 세관구내에 6홀 코스의 골프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인 골프 선수는 볼 수 없었고 영국인들은 매일같이 골프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 후, 1905년 청일전쟁으로 관세 업무가 일본 재정 고문에게 이관됐고, 영국인들은 모두 철수한다. 영국인의 주택을 철거하다가 골프채가 발견됐고, 그곳 촌로(村老)들의 구전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일본보다 앞선 역사

 

1972년 1월 28일 일본 관세협회에서 발간한 관세 백년사의 상권 제3장 1절에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됐고, 청국에서 영국에 관세 업무의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관세 행정기관은 총세무사청이라는 독립기관이 설치돼 있었다. 1905년 2월부터는 관세 전반 업무가 일본 재정고문에게 이관됐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1941년 발간된 일본의 한 골프 전문지 11월호에 기고된 3페이지 분량의 ‘조선골프소사’라는 제목의 글에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는 영국인에 의해서 1900년 원산 세관 구내에서 시작됐다’고 기록돼 있다.

건설 일자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지 않지만, 1901년 최초의 골프장이 건설된 일본보다 몇 년 앞선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확장 공사로 인해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역사적 의미가 깊은 효창원 코스

 

우리나라 최초의 원산골프장이 외국인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코스라면, 효창원골프장은 우리나라 골프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한일합방조약은 민족 자존심 차원에서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가 조인되고 일본이 우리나라의 모든 내정에 간섭할 때 조선철도국 역시 일본인의 손으로 운영됐다.
조선철도국의 이사가 출장 중 골프코스에서 즐거운 라운드를 마치고 경성에도 골프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효창원코스는 조선 왕실의 묘소 위에 지어진 곳으로 ‘조선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골프코스 건설에 대한 내용은 ‘조선철도국과 조선호
텔이 골프코스의 건설로 숙박의 수익을 내기 위해 용산 효창원 부근의 국유지를 차용해 골프장을 건설하고 운영하려 함’이라 적혀있다.

이 문서로 조선철도국은 1918년 5월에 이를 허가했고, 다음 해인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 와중에도 효창원 골프장의 건설 준비는 계속돼 미국인 H. E. Dannt에게 골프장의 설계를 맡겼다.

그는 회고록에 ‘1919년 5월 만주철도주식회사(전 조선철도국)의 초청으로 처음 경성을 찾았다. 조선호텔 지배인이 골퍼는 아니었지만, 그는 골프코스에 필요한 모든 토지를 마련한 뒤였고, 9홀의 설계만 하면 되는 구체적인 안을 갖고 있었다. 나는 단지 티잉그라운드와 벙커 그리고 그린의 위치만 정해줬다. 하지만,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에 손을 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묘의 처리였다. 묘를 치우면 간단하겠지만, 묘의 이장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코스를 만듦에 있어 조심할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특히 설계하면서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2번홀부터 9번홀까지 홀마다 특성을 살려 애칭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2번홀은 ‘파라다이스’, 3번홀은 ‘알프스’, 4번홀은 ‘펀치볼’, 5번홀은 ‘고개(Toge)’, 6번홀은 ‘푸른잎’, 8번홀은 ‘장사’, 8번홀은 ‘북한’, 9번홀은 ‘F.D.A(Free Drink For All)’로 구분돼 있다.
효창원코스는 예산난으로 6홀을 먼저 건설하고 그 후 9홀로 증설됐다. 하지만, 내장객 대부분이 조선호텔의 외국인 내장객뿐이어서 심한 경영난을 겪으며 9홀 중 7홀만 운영하게 된다. 심한 경영난의 타개책으로 구락부를 조직하기 시작해 총독부, 체신국, 도청, 군 기관, 주요 민간인에게도 입회를 권유하게 됐다.
그러다 1922년 정무 총감이 새롭게 취임하며 영국식 골프의 이해도가 높은 그의 노력으로 일본인들의 플레이 방식이 달라졌다. 당시 그는 골프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골프에 대한 레슨과 룰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효창원골프장은 1924년 12월 주민과의 마찰과 효창원 공원화 계획 등으로 3년 만에 폐장의 길을 걸었다.

 

 

Credit

이동훈 자료 골프저널 DB, LET

magazine@golfjourna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단영역